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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독문학:릴케 [2021/02/18 14:37]
clayeryan@gmail.com [성숙기]
문학:독문학:릴케 [2022/01/08 00:58]
clayeryan@gmail.com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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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태생 독일의 시인. 오스트리아 태생 독일의 시인.
 </WRAP> </WRAP>
 +http://xaiyan.dothome.co.kr/gnu/bbs/board.php?bo_table=author&wr_id=25&page=1
 =====생애===== =====생애=====
  
 ====유년기==== ====유년기====
  
-릴케는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던 부모 밑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문학:독문학:images_1_.jpg?nolink&200 |}}릴케는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던 부모 밑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요제프는 말단 공무원이었던 반면, 중상류층의 상인이자 황제 고문관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꽤 까다로운 여인으로, 늘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과 결혼했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 요제프는 말단 공무원이었던 반면, 중상류층의 상인이자 황제 고문관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꽤 까다로운 여인으로, 늘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과 결혼했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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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기====  ====노년기====
  
-자신이 선택한 마지막 고국인 스위스에서 7년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창조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1921년 여름 발레리 지방의 론 강가에 위치한 샤토 드 뮈조의 성(城)에 한 스위스인 후원자의 손님으로 묵게 되었다. 1922년 2월 여기서 정열적인 창작욕구를 가지고 몇 년 전부터 쓰기 시작했던 연작 〈두이노의 비가〉를 불과 며칠 만에 거의 힘들이지 않고 완성하였다. 또한 55편의 시로 구성된 훌륭한 연작시집을 완성할 수 있었는데, 이 작품이 바로 분위기와 주제면에서 〈비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였다.〈두이노의 비가〉는 릴케 시의 정점이다. 〈시도시집〉에서 '생'에 대한 순진하고 불확실한 찬양으로 출발한 릴케의 시 세계는 〈말테의 수기〉에서는 "이처럼 혼돈의 세계 위에 매달린 생은 불가능하다"라는 말로 표현되다가, 〈비가〉에서는 생을 본질로서 찬양하고 정당화하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1925년 릴케는 "〈비가〉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긍정이 동일한 것으로 입증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비가〉는 '현대'인의 상황, 즉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정신의 우주론적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상속권이 상실된' 의식의 상태를 반영하는 새로운 신화로 볼 수 있다. 릴케 역시 철학자 니체처럼 그리스도교 정신이 내세우는 내재성과 초월성이라는 이원론에 반대한다. 그 대신에 '우주 내재적 공간'이라는 단호한 일원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생과 죽음, 지상과 공간, 시간의 차원들이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단일한 통일성으로 응축된 공간이다. 이와 같은 릴케식 신화는 동물에서 '천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를 위계적인 질서로 파악하는 중세 우주관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닌 우주론으로 나타나며 이 우주론은 결과적으로 존재와 생의 체계적이고 일관된 '신조'를 낳는다. 여기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일벌들"이라는 감각적 인식을 통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사명을 떠맡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궁극적인 숙명은 '이야기'나 '노래'나 '칭송' 또는 '찬양' 가운데서 선택한 행위로 구체화된다. 결국 시인은 〈제9비가〉나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에서 명확하게 나타나듯이 (신의 가명인) '천사 앞에서' 인류의 주역 또는 대표자로 등장하게 된다. 말년의 릴케가 주창한 이 메시지는 한편에서는 '생'의 새로운 종교로서 찬양받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방종한 유미주의로서 비판받기도 했으며, 개인적인 재능이 있다 해서 시인편에서 '자기구원'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22년 2월에 발표된 눈부신 승리의 작품 〈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가 릴케 말년의 주요업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기 시 가운데는 주제와 양식 두 측면에서 〈비가〉·〈소네트〉를 능가할 정도의 작품들이 있었다. 이 시들은 1920년대 시적 언어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보이는 실험적인 형식의 미를 추구하고 있다. 그외에도 거의 노래와 같은 단순한 시, 짧은 연작시, 발레 지방의 풍경에 경의를 표하면서 프랑스어로 쓴 4권의 시집이 있다. 뮈조는 그대로 성에 남았지만 릴케는 스위스 여행을 계속하면서 친구들과 끊임없이 교제하고 수많은 편지를 교환했다. 1925년초에는 자신의 문학적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파리로 건너갔고 이곳에서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와 같은 옛 친구들을 비롯하여 자신의 새로운 숭배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제 릴케는 자신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럽의 중심지 파리에서 문학 전성기의 중심부에 있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 파리 방문은 이미 허약해져 있던 그에게 지나친 과로의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파리를 떠났다. 이미 1923년부터 릴케는 병을 앓아 쇠약해 있었지만 1926년 12월 죽기 몇 주 전에야 그 원인이 희귀한 불치병인 백혈병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제네바 호숫가의 테리테트에 있는 한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다.+자신이 선택한 마지막 고국인 스위스에서 7년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창조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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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여름 발레리 지방의 론 강가에 위치한 샤토 드 뮈조의 성(城)에 한 스위스인 후원자의 손님으로 묵게 되었다. 1922년 2월 여기서 정열적인 창작욕구를 가지고 몇 년 전부터 쓰기 시작했던 연작 〈두이노의 비가〉를 불과 며칠 만에 거의 힘들이지 않고 완성하였다. 또한 55편의 시로 구성된 훌륭한 연작시집을 완성할 수 있었는데, 이 작품이 바로 분위기와 주제면에서 〈비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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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이노의 비가〉는 릴케 시의 정점이다. 〈시도시집〉에서 '생'에 대한 순진하고 불확실한 찬양으로 출발한 릴케의 시 세계는 〈말테의 수기〉에서는 "이처럼 혼돈의 세계 위에 매달린 생은 불가능하다"라는 말로 표현되다가, 〈비가〉에서는 생을 본질로서 찬양하고 정당화하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1925년 릴케는 "〈비가〉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긍정이 동일한 것으로 입증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비가〉는 '현대'인의 상황, 즉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정신의 우주론적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상속권이 상실된' 의식의 상태를 반영하는 새로운 신화로 볼 수 있다. 릴케 역시 철학자 니체처럼 그리스도교 정신이 내세우는 내재성과 초월성이라는 이원론에 반대한다. 그 대신에 '우주 내재적 공간'이라는 단호한 일원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생과 죽음, 지상과 공간, 시간의 차원들이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단일한 통일성으로 응축된 공간이다. 이와 같은 릴케식 신화는 동물에서 '천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를 위계적인 질서로 파악하는 중세 우주관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닌 우주론으로 나타나며 이 우주론은 결과적으로 존재와 생의 체계적이고 일관된 '신조'를 낳는다. 여기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일벌들"이라는 감각적 인식을 통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사명을 떠맡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궁극적인 숙명은 '이야기'나 '노래'나 '칭송' 또는 '찬양' 가운데서 선택한 행위로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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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시인은 〈제9비가〉나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에서 명확하게 나타나듯이 (신의 가명인) '천사 앞에서' 인류의 주역 또는 대표자로 등장하게 된다. 말년의 릴케가 주창한 이 메시지는 한편에서는 '생'의 새로운 종교로서 찬양받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방종한 유미주의로서 비판받기도 했으며, 개인적인 재능이 있다 해서 시인편에서 '자기구원'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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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2월에 발표된 눈부신 승리의 작품 〈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가 릴케 말년의 주요업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기 시 가운데는 주제와 양식 두 측면에서 〈비가〉·〈소네트〉를 능가할 정도의 작품들이 있었다. 이 시들은 1920년대 시적 언어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보이는 실험적인 형식의 미를 추구하고 있다. 그외에도 거의 노래와 같은 단순한 시, 짧은 연작시, 발레 지방의 풍경에 경의를 표하면서 프랑스어로 쓴 4권의 시집이 있다. 뮈조는 그대로 성에 남았지만 릴케는 스위스 여행을 계속하면서 친구들과 끊임없이 교제하고 수많은 편지를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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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초에는 자신의 문학적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파리로 건너갔고 이곳에서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와 같은 옛 친구들을 비롯하여 자신의 새로운 숭배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제 릴케는 자신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럽의 중심지 파리에서 문학 전성기의 중심부에 있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 파리 방문은 이미 허약해져 있던 그에게 지나친 과로의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파리를 떠났다. 이미 1923년부터 릴케는 병을 앓아 쇠약해 있었지만 1926년 12월 죽기 몇 주 전에야 그 원인이 희귀한 불치병인 백혈병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제네바 호숫가의 테리테트에 있는 한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H.E. Holthusen 글 | 金英木 옮김 H.E. Holthusen 글 | 金英木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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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boren am 4. Dezember 1875 in Prag. Rilke war der Sohn eines Militärbeamten und Beamten bei der Eisenbahn. Besuchte die Militärschule St. Pölten 1886 bis 1891 und danach die Militär-Oberrealschule in Mährisch-Weißkirchen. Der sensible Knabe wich der Offizierslaufbahn aus, bereitete sich privat auf das Abitur vor und studierte Kunst- und Literaturgeschichte in Prag, München und Berlin. 1897 Begegnung mit Lou Andreas-Salomé, mit der er 1899/1900 nach Rußland reiste. Das Land, die Menschen, vor allem die »russische Seele« beeindruckten ihn sehr. Begegnung mit Tolstoi. 1900 ließ er sich in der Malerkolonie Worpswede nieder und heiratete die Bildhauerin Clara Westhoff, von der er sich 1902 wieder trennte. 1905 wurde er für acht Monate der Privatsekretär von Rodin in Paris. Reisen nach Nordafrika, Ägypten, Spanien. 1911/12 lebte er auf Schloß Duino an der Adria bei der Fürstin Marie v. Thurn u. Taxis. Im 1. Weltkrieg in München; kurze Zeit beim österreichischen Landsturm; aus Gesundheitsgründen entlassen. Nach Kriegsende in der Schweiz: 1920 in Berg am Irschel, seit 1921 auf Schloß Muzot im Kanton Wallis, das ihm sein Mäzen Werner Reinhart zur Verfügung gestellt hatte. Er starb am 29. Dezember 1926 im Sanatorium Val-Mont bei Montreux an Leukämie. Geboren am 4. Dezember 1875 in Prag. Rilke war der Sohn eines Militärbeamten und Beamten bei der Eisenbahn. Besuchte die Militärschule St. Pölten 1886 bis 1891 und danach die Militär-Oberrealschule in Mährisch-Weißkirchen. Der sensible Knabe wich der Offizierslaufbahn aus, bereitete sich privat auf das Abitur vor und studierte Kunst- und Literaturgeschichte in Prag, München und Berlin. 1897 Begegnung mit Lou Andreas-Salomé, mit der er 1899/1900 nach Rußland reiste. Das Land, die Menschen, vor allem die »russische Seele« beeindruckten ihn sehr. Begegnung mit Tolstoi. 1900 ließ er sich in der Malerkolonie Worpswede nieder und heiratete die Bildhauerin Clara Westhoff, von der er sich 1902 wieder trennte. 1905 wurde er für acht Monate der Privatsekretär von Rodin in Paris. Reisen nach Nordafrika, Ägypten, Spanien. 1911/12 lebte er auf Schloß Duino an der Adria bei der Fürstin Marie v. Thurn u. Taxis. Im 1. Weltkrieg in München; kurze Zeit beim österreichischen Landsturm; aus Gesundheitsgründen entlassen. Nach Kriegsende in der Schweiz: 1920 in Berg am Irschel, seit 1921 auf Schloß Muzot im Kanton Wallis, das ihm sein Mäzen Werner Reinhart zur Verfügung gestellt hatte. Er starb am 29. Dezember 1926 im Sanatorium Val-Mont bei Montreux an Leukä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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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목록====
  
 1904 Geschichten vom lieben Gott\\ 1904 Geschichten vom lieben G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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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 Das Marienleben\\ 1913 Das Marienleben\\
 1920 Die weiße Fürstin\\ 1920 Die weiße Fürstin\\
-1923 Duineser Elegien\\+1923 [[문학:독문학:릴케:두이노의비가|두이노의 비가]] (Duineser Elegien)\\
 1923 Sonette an Orpheus\\ 1923 Sonette an Orph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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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목록==== 
  
  
-[[문학:독문학:릴케:두이노의비가|두이노의 비가]]